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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턴

nalbo 2024. 1. 29. 10:40


1. 당신 길 끝에 당도한 바람으로 머리채를 묶은 후 당신 무릎에 머리를 대고 처음처럼 눕겠네 꽃의 은하에 무수한 눈부처와 당신 눈동자 속 눈부처를 눈 속에 모두 들여야지 당신을 보아야지 花, 飛, 花, 飛, 내 눈동자에 마지막 담는 풍경이 흩날리는 꽃 속의 당신이길 원해서 그때쯤이면 당신도 풍경이 되길 원하네 그날이 오면 내게 필요한 건 이름 붙이지 않은 꽃나무 한 그루와 당신뿐 당신뿐 대지여 - 김선우,「花飛, 그날이 오면」 화비(花飛)는 어의로 풀면 꽃이 흩날린다는 뜻이다. 시인은 땅으로 떨어지는 꽃을 “길 끝에 당도한 바람으로 머리채를 묶은 후/ 당신 무릎에 머리를 대고 처음처럼” 눕는 존재로 표현한다. 길을 타고 온 바람을 맞고 꽃이 떨어지는 건 자연이다. 떨어지는 순서만 다를 뿐, 겨울이 오기 전에 모든 꽃은 제 생명 줄을 놓고 땅으로 떨어진다. 바람은 그러니까 봄에서 가을까지 시간의 길을 타고 온 바람일 것이다. 바람이 꽃을 피우고, 바람이 꽃을 떨어뜨린다. 아니, 이렇게 표현해도 된다.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면 꽃은 제 몸을 열고, 차가운 바람이 불면 꽃은 제 몸을 닫는다. 제 몸을 닫은 꽃이 어떻게 생명 줄을 붙들 수 있을까. 바람은 세상을 향해 꽃을 열게 하면서, 동시에 꽃으로 하여금 세상과 연을 끊는 모티브로 작용한다. 바람이 있어 꽃은 꽃이 되고, 바람이 있어 꽃은 다시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다. 꽃을 떨어뜨리는 바람은 그러므로 시간이 흐르면 꽃을 피우는 바람으로 변주된다. 차가운 바람에 몸을 스친 꽃은 두려움 없이 떨어져 “처음처럼” 당신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눕는다. 어릴 때는 엄마 무릎을 머리로 베고, 성장해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무릎에 머리를 뉘었다. 베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벨 수 있는 무릎이 아니다. 오로지 나만 벨 수 있는 무릎이다. 무릎에 머리를 대는 순간 전해오는 그 느낌은 오로지 ‘나’만을 위한 것이다. 거기에는 다른 무엇이 끼어들 틈이 없다. 말 그대로 절대적인 감각이다. 시인은 “처음처럼”이라는 시구로 이 감각을 표현한다. 꽃의 은하에는 무수한 눈부처들이 있다. 땅으로 떨어지는 꽃눈 하나하나가 그대로 부처의 품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일까. 당신 눈동자 속에서 시인은 “나의 눈부처”를 본다. 나의 눈부처는 당신에게서 뻗어 나온 것이지만, 그래서 언제나 당신 눈동자 속에는 나의 눈부처가 들어 있지만, 나의 눈부처는 한편으로 당신과는 다른 흔적을 늘 지니고 있다. 그 흔적으로 나의 눈부처는 꽃이 된다. 시인은 “당신 눈동자 속 나의 눈부처를/ 눈 속에 모두 들여야지”라고 쓰고 있다. 당신 눈동자 속에 있는 나의 눈부처를 떨어지는 꽃은 제 눈 속에 모두 들이려고 한다. 떨어지는 꽃눈 속에는 그러므로 나의 눈부처와 함께 나의 눈부처를 품고 있는 당신 눈동자 또한 들어있게 된다. 당신 눈동자에서 나온 나의 눈부처가 당신 눈동자를 다시 낳는 눈이 되는 이 순간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당신과 나는 둘이면서 하나이다. 당신은 여전히 당신으로 있고, 나는 여전히 나로 거듭해서 태어날 테지만, 그럼에도 당신과 나는 언제나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 운명을 시인은 때가 되면 땅으로 떨어지는 꽃의 자연에서 찾는다. “처음처럼”에 새겨진 시적 의미는 무엇보다 둘이면서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당신과 나의 역설에 걸려 있다. 하늘을 보는 건 그러므로 당신을 보는 것이고, 당신을 보는 건 그러므로 나를 보는 것이다. 하늘과 당신과 나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동시에 셋이었다가 다시 하나로 모이는 운명을 타고났다. 떨어지는 꽃은 허공을 흩날리며 꽃의 은하를 수놓은 무수한 눈부처를 본다. 자기이면서 자기가 아닌 존재들이 당신 무릎을 향해 주저 없이 제 몸을 떨군다. 시인은 “내 눈동자에 마지막 담는 풍경이/ 흩날리는 꽃 속의 당신이길” 원한다. 떨어지는 꽃이 펼치는 마지막 풍경 속에 당신이 있고, 시인이 있다. 이별이되 이별이라고만 할 수 없는 상황을 시인은 언어로 그려낸다. “花, 飛, 花, 飛”라는 한자어를 한 행으로 사용해 시인은 꽃이 허공을 흩날리는 바로 그 장면을 즉물적으로 표현한다. 물론 이 시를 읽는 독자들 머릿속에 그려진 낙화(落花)의 풍경이다. 시인이 떨어지는 꽃 속에서 만남과 이별을 넘어서는 당신을 보고 있는 것처럼, 이 시를 읽는 독자들 또한 무수히 떨어지는 꽃잎들을 상상하며 그 속에 묻혀 덧없이 사라진 그 많은 인연들을 봐야 한다. 떨어지는 꽃잎 하나하나가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간 인연들이다. 그 속에 내가 있고 당신이 있고, 시를 쓰는 시인이 있다. 꽃이 허공에 흩날리는 그날을 시인은 상상으로 떠올린다. 모든 것을 놓고 가야 하는 시간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맞아야 할까? 꽃은 생명 줄에 집착하지 않는다. 때가 되면 꽃은 기꺼이 땅에 떨어져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날이 오면 떨어지는 꽃 앞에 남는 것은 오직 당신밖에 없다. “이름 붙이지 않은 꽃나무 한 그루와/ 당신뿐/ 당신뿐”이라고 시인은 노래한다. 이름 붙이지 않은 저 꽃나무는 봄이 오면 다시 꽃을 피울 것이다. 따뜻한 바람이 일렁이는 꽃나무 위에서 가을바람에 떨어진 그 꽃처럼 또 처음인 양 피어나는 봄꽃들. 생명이 생명을 낳고, 죽음이 죽음을 낳고, 다시 생명이 죽음을 낳고, 또 다시 죽음이 생명을 낳는다. 당신이라는 대지는 한 송이 꽃을 피우는 어미이고, 떨어지는 꽃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어미이다. 한 송이 꽃은 대지에서 태어나 다시 대지로 돌아가는 삶을 반복한다.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다. 해마다 피는 꽃은 저마다의 생을 살다가 저마다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 속에서 시인은 ‘당신’을 본다. 언제나 어김없이 거기에 있는 당신이다. 2. 울음 回 허공을 떠돌며 돌들이 울었다 돌 우는 소리 때문에 달이 붉었다 “엄마, 슬픈 사람들이 떠다녀.” 누구나 볼 수 있으나 보지 않으려는 이들이 더 많았다 모두가 보았을 때에도 누구나 울지는 않았다 아프고 아름다운 땅이었다 눈이 멀 것 같은 밤이었다 - 김선우, 「om의 녹턴」 처음 ‘회(回)’라는 한자어가 보인다. 하긴 이 글자를 꼭이 한자어 ‘회’로 볼 필요는 없다. 안과 바깥에 네모가 있는 이미지로 읽어도 된다. ‘네모 안에 네모’는 안으로 수렴되는 길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밖으로 확산되는 길도 나타낸다. 안으로 모이고 밖으로 퍼지는 길을 시인은 이 모양으로 표현한다. 네모 안에 네모는 있는 달리 말하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구멍이기도 하다. 네모 안에 네모가 있고, 그 네모 안에 또 네모가 있고, 그렇게 반복되다 보면 네모는 결국 하나의 점으로 변한다. 둥근 점 하나가 이어지고 이어져 네모를 이룬다. 네모는 그러니까 둥은 점을 그 속에 지니고 있다. 겉으로는 네모지만 속으로는 둥근 이 이미지로 시인은 무엇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일까? 한자어 회(回)는 ‘돌다, 돌아가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회랑(回廊)이라는 말처럼 ‘회’는 돌고 돌아 하나로 이어지는 순환의 의미로 뻗어 나가는 셈이다. 시인은 2연에서 허공을 떠돌며 우는 돌을 이야기한다. “돌 우는 소리 때문에 달이 붉었다”. 돌이 우는 소리와 달이 붉은 것은 인과관계가 없다. 그런데도 시인은 왜 돌 우는 소리와 붉은 달을 ‘~때문에’로 잇고 있을까. 세상을 인과의 눈으로 보는 사람은 보이는 것 너머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래서 이렇고, 저것은 저래서 그렇다. ‘이래서’와 ‘저래서’에 묶인 사물은 수많은 의미로 뻗어 나가지 못하고, 오직 ‘인과’라는 틀 속에 갇혀버린다. 인과로 본다면 돌이 어떻게 울 수 있는가. 혹시라도 돌이 정말로 우는지를 따지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인과의 사슬에 완전히 묶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돌이 정말로 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돌의 울음을 듣는 시심(詩心)이 중요할 뿐이다. 달이 왜 붉어졌는가? 돌이 울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 우는데 어떻게 달이 울지 않을 수 있는가. 돌과 달이 우는데 어떻게 시인이 울지 않을 수 있는가. “엄마, 슬픈 사람들이 떠다녀.”라고 아이가 말한다. 문맥으로 보면 슬픈 사람들은 붉은 달을 가리킨다. 돌이 울고 달이 울고 아이가 운다. 그러니 당연히 엄마도 운다. 여기저기서 우는 존재들을 보고 아이는 엄마에게 슬픈 사람들이 떠다닌다고 말한다. 눈물이 어룽진 눈으로 보면 사물들이 둥둥 떠 보일 때도 있지 않은가. 아이는 돌이 우는 걸 듣고, 달이 우는 걸 본다. 달이 울어서 붉어지면, 달보다 먼저 운 돌 또한 달을 따라 몸이 붉어질 수밖에 없다. 돌은 돌이고, 달은 달이다. 돌은 돌을 벗어나 달이 되고, 달은 달을 벗어나 돌이 된다. 돌이 달이 되고 달이 돌이 되면, 어느새 달은 달이 되고 또 돌은 돌이 된다. 돌은 돌이면서 달이고, 달은 달이면서 돌이다. 아이와 엄마라고 다를까. 돌과 달과 아이와 엄마가 이루는 세계는 돌이 울면 달이 붉어지는 세계의 논리를 그대로 따른다. 이리 보면 아이는 아이이면서 엄마이다. 누구나 볼 수 있는 사물을 우리는 아무나 볼 수 없는 사물이라며 애써 외면한다. 시인의 말마따나,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왜냐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사유하는 게 ‘미치도록’ 사람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것도 바빠 죽겠는데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라고 하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소리를 지껄일 수 있단 말인가. 시인은 이야기한다. “모두가 보았을 때에도 누구나 울지는 않았다”고. 돌이 울면 달이 울고, 달이 울면 아이가 울고, 아이가 울면 엄마가 우는 까닭은 돌과 달과 아이와 엄마 사이를 가로지르는 공감 능력이 있어서이다. 공감 능력이 없는 존재는 돌이 울어도, 아이가 울어도 더불어 울어주지 못한다. 한 아기가 울면 다른 아이가 울고, 다른 아기가 울면 또 다른 아이가 운다. 그렇게 우는 아기 옆에 있는 모든 아기들이 목청껏 울어댄다. 아기들에게 왜 우느냐고 물어야 할까? 시인이 울음이 울음을 낳는 이곳을 “아프고 아름다운 땅이었다”라고 얘기하는 이유는 여기서 비롯된다. 아픈 것은 나쁘고 아름다운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그저 아픈 것이 있고 아름다운 것이 있다. 아프고 아름다운 땅은 그러므로 아픈 것들이 아름답게 공존하는 곳일 수도 있고, 아름다운 것들이 아프게 공존하는 곳일 수도 있다. 아픔과 아름다움을 나눌 수 없는 세계, 아름다움과 아픔이 둘이 아닌 하나가 되는 이 세계를 시인은 “눈이 멀 것 같은 밤”으로 표현한다. 눈이 멀면 눈으로 보는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보인다. 아프고 아름다운 땅을 보려면 그래서 눈이 멀어도 상관없다. 회(回)라는 글자만 해도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네모 안으로 모여들면 점이 되고, 네모 밖으로 뻗어 나가면 무한이 된다. 점과 무한 사이에서 의미가 나온다. 하나였다가 이내 여럿으로 번지는 의미. 하나와 여럿 사이를 오가는 그 소리, 그 의미가 바로 ‘옴om’이다. 눈을 감은 채 입을 동글게 오므리고 ‘옴’ 소리를 내뱉으면 몸속에는 둥근 파장이 일어난다. 입에서 시작된 파장은 배꼽 아래 단전으로 흘러들었다가 온몸으로 퍼진다. 옴은 내면에서 울리는 거룩한 목소리다. 거룩하다는 말을 종교적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눈을 감고 옴 소리가 온몸을 퍼지는 걸 가만히 느끼다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거룩한 존재인지 새삼 알게 된다. 세포 하나하나가 옴 소리에 반응하여 살아나는 것 같다. 시인은 ‘om의 녹턴’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상황을 표현한다. 녹턴은 야상곡(夜想曲)을 가리킨다. 밤을 모티브로 한 음악이 야상곡이다. 빛이 지배하는 근대사회는 밤=어둠을 빛 밖으로 추방했지만, 시인들은 여전히 밤과 어둠을 친숙하게 느낀다. 김선우는 이 어둠 속 세계를 ‘om’이라는 소리로 담아낸다. 내면으로 들어가는 소리, 한편으로 몸 밖으로 한없이 퍼져 나가는 소리. 옴은 고적한 밤과 참 잘 어울리는 소리이다. 어둠 속에서 고요히 흔들리는 마음의 물결에 주목하다 보면, 돌이 우는 소리가 들리고, 달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시인은 안과 밖이 어둠 속에서 하나로 이어지는 이 세계를 소리로는 ‘om’으로, 글자로는 회(回)로 표현한다. 잔잔한 강물에 돌 하나가 떨어지면 동심원이 일어난다. 동심원은 돌과 강물이 만나야 비로소 강물 위로 펼쳐진다. 돌과 강물이라는 둘이 하나로 수렴될 때 동심원이라는 확산 현상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옴om’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입을 오므리고 소리를 내리지 않으면 옴 소리는 온몸으로 퍼지지 않는다. 옴 소리
기억, 지금 가장 능동적인 사랑의 방식
‘나들’의 몸속으로 스며 울리는 한밤의 진혼가

나는 쓰는 자이고 사랑하는 자이다. 이것이 나의 정체성이다.

시인이자 에세이스트이며 소설가인 김선우의 다섯번째 시집 녹턴 이 출간되었다. 네번째 시집 이후 걸출한 장편소설과 통찰력이 돋보이는 에세이들을 선보이며 자신의 문학세계를 벼려온 김선우가 4년 만에 펴낸 이번 시집에서는, 세상 낱낱의 존재들과 눈을 맞추며 경이로운 생명력을 이야기하는 특유의 여린 강인함이 빛을 발한다. ‘잉태하고, 포옹하고, 사랑하는’ 몸에 대한 애착은 모든 시간에서 고유한 언어를 창조해내는 온몸의 유희 가 되고, 시인 안팎에 부글거리는 ‘나들’의 향연은 살아 있는 한 끝나지 않을 혁명 으로 계속되는 것이다.

아름답고 여린 말을 매만져 예측하지 못한 힘을 자아내는 김선우의 시는 슬픔에 빠지지 않는 진혼가이자 끝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시, 격분하지 않되 묵직하게 끓어오르는 투쟁가로 읽힌다. 고요한 밤을 조용히 울리며 감정을 뒤흔드는 야상곡인 듯, 신비롭고 조화로운 리듬들로 이루어진 무언가(無言家, 보칼리제)인 듯, 67편의 잘 익은 시들은 편편이 서로 공명하고 있다.


1부
花飛, 그날이 오면
소울메이트
검은 미사에서 나를 보았다
싸락눈
한 방울
이런 이별

몸과 몸이 처음 만나 보얘진 그 입김을 말이라 했다
조금 먼 아침
나들의 시 om 11:00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바로 그 시간에
별들이 구부리는 법을 가르친다
나들의 시, 너의 무덤가에서
타락천사, om 12:00
참나라니, 참나!
몸살
게이트리스 게이트
민달팽이를 보는 한 방식
견주,라는 말
om의 녹턴

2부
허공
상냥한 지옥
빗방울 밥상
천도복숭아의 시간
om 2:00의 고양이 핑크
질문들, om의 여름풀밭
걸식이 어때서?
om의 문답 B형
om 4:00, 사랑이 변하는 게 어때서?
om 3:00 미루나무 그늘에서 천사를 죽였다
CATACOMB SEOUL
봄의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해 봄 처음으로 神을 불렀다 1
그해 봄 처음으로 神을 불렀다 2
지옥에서 보낸 두 철
지옥에서 보낸 세 철
풍찬노숙의 序
21세기도시조경사소년의 고해성사
초승달의 시간 그 바닷가 숲에서
화살기도
피자두
풍찬노숙의 終
om의 물거울, 곡비, 혹은 태양풍의 노래

3부
아픈 잠은 어떻게 야크 뿔 속으로 들어갔나
음, 파, 음, 파 om의 수영장
詩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유
非인간
시인 것
나들의 안녕
시인
냇가로
혁명의 조건
그 광장, 사과 한 알이
변검
시집
사랑
엄마가 엄마를 부르는 om의 한밤
풀꽃의 집에 대하여
바람의 옹이 위에 발 하나를 잃어버린 나비 한 마리로 앉아
달걀 삶는 시간
기원전후의 아침 산책
눈 쓰는 사람
햇봄, 간빙기의 순진보살
가까운 아침
고쳐 쓰는 묘비
보칼리제, om 0:00
花飛, 먼 후일
해설 | ‘나들’의 사랑과 진혼?이광호